한국인이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에게 많이 핍박과 학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이 독일 정부 밑에서 6백만이나 피살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쩌다가 학회 때문에 바르샤바에 갔다가, 아유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구경할 생각이 있었지만, 호텔에서 기차역까지 가야 하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아유슈비츠까지 가야 하고, 또 내려서 수용소까지 가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다행히 관광자들에게 개인 안내가 (1인당 약 300 유로) 있어, 안내를 받기로 했다.
기차비가 적지 않으므로 한 안내원이 끝까지 손님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원 3명이 따로 각 지역에 나타나서 안내했다. 첫째 안내원은 호텔에서 택시로 기차역까지 안내해 주었다. 둘째 안내원은 아우슈비츠 담당, 셋째 안내원은 크라코 안내를 맡았다. 크라코 역에 내려서 곧 기차역을 나가려다가 어떻게 둘째 안내원이 집사람과 나를 알아볼까 걱정이 되었다. 다시 플랫폼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니 어떤 한국인이 손을 흔들며 혹시 아유슈비츠에 가는가 물었다. 다행히 그는 같은 관광 코스로 동행하는 사람이었고, 둘째 안내원은 우리를 찾고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자동차로 아우슈비츠까지 또 1시간 넘어 걸렸다.
강제 수용소에 도착하니,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렇게 긴 줄 끝에 서면 두어 시간이 지나야 수용소 안에 들어 갈 것 같았다. 다행히 안내원이 우리를 위해서 따로 표를 사가지고 와서, 우리는 기다릴 필요가 없이 당장 들어갈 수 있었다. 돈이 들기는 해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안내원 고용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문구가 많은 유대인을 속였다.
한번 들어오면 죽기 전에 다시 나가기기 힘들었겠지.
1942년 3월까지 9천 명이 여기서 죽어갔다. 전쟁이 확대되자, 더 많은 인원이 아우슈비츠로 들어오자, SS(Schutzstaffel, 나치당의 보안대)는 이웃 마을 비르케나우(Birkenau)에 몇 배나 더 큰 시설을 만들었다. |
수용소의 감방 중의 하나. 유대인을 죽이는 데 쓰인 화학 약품 깡통, 구두와 가방과 옷가지 따위의 유대인의 소지품이 진열되어 있고, 침구가 진열되어 있다.
사진은 찍어도 올려 놓기가 거북하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유대인, 폴랜드인, 러시아인을 보냈다.
학대 받던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광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