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句踐)의 청동검과 부차(夫差)의 창

누구나 다 아는 와신상담(臥薪嘗膽) 이야기이다.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저장성의 가흥(浙江省嘉興)에서 싸워 패한 뒤에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496년). 와신은 땔 나무 위에 눕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월왕 구천이 네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아버지가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오왕 부차(夫差)가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땔나무 위에 누웠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가 군사 훈련을 하면서 복수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3년 뒤에 월나라 군사가 선제 공격을 했으나 구천은 오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기원전 494년). 구천은 오나라 재상 백비에게 뇌물을 바치고 또한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하며 항복을 청하였다. 3년 동안 구천과 범려는 부차의 노복으로 일하며 고역을 견디었다. 오나라의 중신 오자서(伍子胥, 기원전 559(?) – 484년)의 간언도 묵살하고 재상 백비의 진언을 받아들여 부차는 구천의 청을 받아들이고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구천은 고향으로 돌아오자 쓸개를 맛보며 (嘗膽) 복수할 기회를 기다렸다.

오왕 부차(夫差)는 노(魯)와 제(齊)를 무찌르고 난 뒤에, 패자가 되려고 하였다. 기원전 482년 봄에 기(杞) 땅의 황지(黃池, 河南省杞縣)에 부차는 제후들을 모아 놓고 제후들과 회맹하였다.

壺(호, 호리병) 전국 시대, 제사 때 술담는 그릇. 진나라의 장관이 주조한 그릇. 대영 박물관.

이 술 병에 쓰여진 金文에 따르면, 플랜지 (위쪽 가장자리)에는 오나라와 진(晋)나라가 회맹(會盟)한 것을 기념하여 진나라의 장관 (Zhou Meng)이 이 그릇을 (한 쌍으로) 주조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아마도 오나라와 진나라가 하나씩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이 회맹에서 오왕 부차는 일시나마 맹주가 되었으나 회맹하느라고 자리를 비운 동안에, 수년간 상담(嘗膽)하고 있던 월왕 구천(勾踐)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전투가 벌어진 뒤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인 수저우(蘇州)에서 구천은 오왕 부차를 굴복시켰다. 구천은 부차에게 용동에서 한가히 여생을 보내라고 호의를 베풀었으나 사양하고 자결했다고 한다. 그 후 구천은 북상하여 도읍을 산동 지방의 낭야로 옮기고, 주(周) 원왕(元王) 때 정식으로 패자의 칭호를 받았다.

구천은 부차 다음에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전국 시대에 들어와 월나라는 국세가 약해졌고, 기원전 306년, 구천의 후손 무강(無彊)은 초나라 위왕(威王)의 침공을 받아 패하여 처형당하고 나라도 망하였다.

월나라의 위치는 오늘날 저장성 사오싱(紹興)을 중심으로 중국의 동남부와 베트남 북부 지역이었다. 오나라는 양자강 입구에, 초나라의 동쪽에 자리잡았고, 도읍을 지금의 수저우에 도읍으로 옮겼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수저우와 항저우가 있다: 蘇杭=蘇州 수저우, 杭州 항저우)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은 수저우를 살기 좋은 곳으로 친다.) 초나라는 위의 지도에서 보다시피, 양자강 남쪽에 있었다.

전국 시대의 지도

1. 구천의 검
칼날을 제외하고 칼 표면 전체에 마름모 형태의 무늬가 있다.
1965년, 초(楚)나라의 무덤 (望山楚墓群)에서 구천의 청동검이 출토되었는데, 이와 함께 오왕 부차의 창(矛)도 발견되었다. 오 나라가 월나라에게 멸망당한 뒤에, 월나라도 초나라에게 멸망당하였으니, 아마도 초나라가 구천의 동검과 부차의 창을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 같다.이 두 가지가 후베이(湖北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구천의 청동검의 표면에는 8 글자가 상감으로 새겨져 있다. 한자가 통일되기 이전에 월나라에서 쓰던 꼬불꼬불한 글자라서 읽을 수가 없는데, 전문가의 해독에 따르면, 字 越王勾踐自作用劍 (월왕구천자작용검: 월왕 구천이 자기가 쓰려고 만든 검이다)라고 한다. 그래도, 王이니 用이나 自자는 이 꼬불 글자 중에 일부로 어딘가 숨어 있다.
이 검이 수평으로 누워 있어서 사진찍기가 어렵다.

월왕 구천의 검

2. 부차의 창


오왕 부차의 창, 창끝만 청동이고, 나무로 창의 몸을 만들었을 것이다. 2중으로 마름모 무늬가 있다.
전국 시대에는 각 나라가 군사를 키워 이웃을 정복시키려 했고, 군사력이 약한 나라는 언젠가 다른 나라에 정복되었다. 원수 갚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생각했다. 월왕 구천은 원수를 갚았다고 통쾌하게 큰 소리를 질렀을지 모르지만, 그런 태도로 월나라는 얼마 안 가서 초나라에 정복당했다.
이제는 과학 무기가 발달되어 두 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면 당사자뿐 아니라,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

이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과 무역을 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모두가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고 배워서 한반도 전체가 살기 좋은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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