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시절에 로마인의 생활 모습, 에르콜라노

에르콜라노(Ercolano, Herculaneum )는 베수비우스 (Vesuvius) 화산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이고, 나폴리 만에 있다. 졸지에 당한 폼페이 사람들과 달리, 화산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보고 에르콜라노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피난했다고 한때 생각되었는데, 1982년에 수십 명의 주민이  boathouse에서 화산재에 매장된 것을 발견하고서 견해가 바뀌었다. 아마도 배를 타고 급히 떠나려다가 재난을 당했을 것이다.

이때 (79년) 에르콜라노는 20미터의 화산재에 덮였다. 1700년대가 되어서야 오스트리아가 나폴리 지역의 소유권을 갖게 되어 왕자 델부프 (d’elbeuf)가 포르티치(Portici)에 별장을 짓다가 발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에르콜라노 유적은 1/4밖에 발굴하지 못했다. 발견된지 몇 백년이 되지만 발굴이 늦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대 도시 밑에 유적이 파묻혀 있고, 땅 밑에 있는 유적을 파겠다고 지금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내쫓을 수 없고 그들의 땅을 사려니 돈을 많이 요구하고, 어쨌든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쳐 발굴이 부진하다고 한다.
에르콜라노의 유적에는 basilica 외에는, 아직까지 다른 공공 건물이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다. 원래 없는지, 아니면 어딘가 파묻혀 있는데 아직 발굴하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폼페이처럼 경기장이나 신전 따위의 건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상인의 건물이나 체유관, 그리고 개인의 별장이 전부이다.

1. 네 가지 벽화 스타일
로마인의 벽화에는 4가지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첫째 스타일은 벽이 색갈 있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것처럼 보이려고 벽을 색칠한 것이다. 진짜 부자는 물론 벽을 대리석으로 지었을 터이지만, 새로 돈을 번 중산층은 그 정도까지 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비슷한 그림으로 만족했던 듯하다.

둘째 스타일은 환상적 또는 건축 스타일이라고도 하는데, 환상적, 입체적 건물 그림을 평평한 벽에 그렸기 때문이다.



셋째 스타일은 화려한 스타일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그림을 전시한 화랑처럼 벽을 다루지만, 건물이 가늘고 비현실적이다.



넷째 스타일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이용하나 화랑처럼 각 벽에 여러 가지 그림을 전시한다. 어떤 벽화는 이 네 가지 중에 어딘가에 속하기도 하지만, 물론 애매한 경우도 있다.
Peter Clement의 웹사이트를 참조하였다. (https://sites.google.com/site/ad79eruption/)


입구에서 내려다 본 에르콜라노 유적. 뒤에 현대 도시 에르콜라노와 대조가 된다.
에르콜라노에는 각 집의 특징을 살려 집 이름을 지었다.
 

2. 개인 별장
(1) House of the Gem


이 집터에서 보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아내 리비아 (Livia)의 모습이 새겨진 보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보석의 집이라 이름이 붙었다.

(2) Terrace of Marcus Nonius Balbus


이 테레스에는 마커스 발부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바른 쪽에 자리잡은 공중 목욕탕을 시민들에게 기증한 듯하다. 발부스는 크레테와 쿠레네(Cyrene) 지방의 총독이었다.

(3) House of Deer


Granius Verus의 집이다. 이 집에는 사슴 몇 마리가 개들에게 물리는 조각들이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이 집에는 유리창이 있었을 것이다.
에르콜라노에 있는 집들은 유리 창문이 있었다고 한다. 공공 건물이나 부자들의 집에서 유리 창문을 썼어도, 사치품이었음이 틀림 없다. 물론, 오늘날 현대 건물에 쓰이는 것 같이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엷은 청색이나 녹색의 유리 창이었다.



에르콜라노 부근에서 발견된, 창에 쓰인 유리. 대영 박물관. 반투명한 유리는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고 빛을 들여 보내니 당시의 로마인에게는 인기가 좋았을 것이다. 로마인은 유리를 만들지 않고 시리아에서 수입하였다.
예수가 살던 시절에 유리창이 있고 기와가 덮인 별장에 부자 로마인이 살았다면, 많은 사람에게 열심히 일하려는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4) House of Aristides


이 집에서 발견된 조각상이 정치가 에스키네스(Aeschines)인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지만, 처음에 성급한 고고학자들이 정치가 아리스티데스(Aristides)의 것으로 잘못 알았다. 그렇다고 집 이름을 바꾸지는 않았다.

(5) House of Argus.


여기 있는 peristyle에는 정원의 3면만 기둥이 버티고 있다.

(6) House of the Inn


이 집이 한 때 여인숙이나 호텔처럼 크게 생각되어 이름이 이렇게 붙었으나, 더 연구해 보니 개인 집이었다고.

(7) House of the Skeleton


해골집의 입구. 대부분의 로마인의 별장 입구의 바닥에는 모자익이 있다. 이 집에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집은 에르콜라노의 주민이 모두 미리 대피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해골 집의 아트리움. 빗물 담는 네모 웅덩이가 없다.


triniclinium (기대는 소파 3개 있는 방, 다이닝 룸)의 벽화. 셋째 스타일. 입체적 효과를 노렸다.


Nymphaeum(님프를 모시는 사당).
(8) House of Neptune and Amphitrite


이 집의 nymphaeum (님프를 모시는 사당)에 있는 벽 모자익. 넵튠(Neptune)과 앰피트리테(Amphitrite, 넵튠의 애인?) 전설에 따르면, 낙소스(Naksos) 섬에서 이 여신이 춤추는 것을 보고 넵튠이 데려가서 결혼한다.


그 옆면의 벽 모자익. 개가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
(9) House of the Relief of Telephus (텔리푸스의 浮彫가 있는 집)


페리스타일.


기둥 뒤에는 아킬레스(Achilles)가 어머니 테씨스(Thetis)가 마이시아(Mysia)의 왕 텔리푸스를 치료하는 것을 구경한다. 복사품.
 

3. 상인 건물
(1) Thermopolium (포도주와 뜨거운 먹을 것을 파는 집)


이 식당은 오늘날의 서민을 위한 음식점에 가깝다. 대개는 ㄱ- 자 모양으로 된 카운터에 여러 구멍이 있고 그 위에 둥근 그릇을 놓고 먹을 것을 끓여서 팔았다. 이것은 ㄷ- 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니 제법 큰 식당이었을 것이다. 이 상점에는1 애스(아우구스투스 당시에, as = 1/4 sestertius) 또는 2 애스 식으로 음식 값을 벽에 적어 놓았다고 한다.

(2) Pistrinum (bakery, 빵 공장)


빵 공장에는 맷돌이 필요하다. 건물의 규모로 보아 빵을 소매한 것 같지 않다. Catullus(맷돌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나무 막대기를 꽂고, 노예나 말이나 당나귀가 이 막대기를 돌린다. 맷돌 아래 부분은 원뿔 모습을 하고 있다.
공장 주인은 아마도 여기서 발견된 반지에 적힌 이름으로 보아,Sextus Patulcius Felix 이다.


맷돌 아래 부분.

(3) 클럽 건물
College of Augustales (아우구스투스 충성파의 전당)
이 집단의 회원들이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모시는 흉내는 내지만, 정치적으로 혜택을 받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으므로 어느 종교의 종파라기 보다는 정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건물의 벽은 전부 넷째 스타일의 벽화로 되어 있다.


sacellum (지붕이 없는 사당, 이 경우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사당이다).


위의 사당 왼쪽에 있는 벽화. 허큘리스 (Hercules)가 왼쪽의 주노(Juno, 결혼의 여신)와 미네르바(Minerva, 지혜의 여신) 옆에 앉아 있다.


바른 쪽의 벽화. 허큘리스가 데이아니라(Deianira)를 유괴한 아케로우스(Achelous, 같은 이름의 江의 신)에 대항하여 싸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숭배는 티베리우스가 서기 14년에 시작하였다. 이 사당을 짓는데 헌금한 사람들의 명단.
 

4. Palaestra
팔레스트라는 일종의 로마인의 체육관이다. 레슬링과 기타 운동을 하기 위한 넓은 지역이고, 포티코(柱廊 현관)에 둘러 싸여 있다)


이곳의 포티코는 특히 길다.


반쪽의 둥근 천장. 이 방에는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이 있는데 아마도 운동 선수들의 상품이나 메달 따위를 진열하는 데 쓰였을 것이라고.



 

5. 로마인의 태도
에르콜라노에 살던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존중하고 무엇이든 그리스 스타일을 따르려 했다. 그리스 스타일을 흉내내되, 대리석은 비용이 많이 들므로 처음에는 벽화로 대체하였고, 하다가 보니 예술 감각을 살려서 다채로운 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포도나 과일 따위를 그린 경우도 있으나, 거의 전부가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주제로 벽화를 그렸다.

정치적으로 그리스인을 지배했어도, 로마인은 자기네의 풍습 중에서 열등한 것은 무엇이나 (종교를 포함하여) 버리고 우수한 그리스 문화를 서슴지 않고 수용했고, 그런 훌륭한 태도 때문에 그리스인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전수해 받았다.

로마인은 점령 지역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걷었고, 또한 유대인은 이를 분개하여 저항했을지 모르지만, 로마인은 받은 세금의 상당 부분을 길을 닦는 데 썼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영토 어디에나 사람들이 처음으로 안심하고 여행할 수 있었고, 기독교 신자들이 전도하러 어디에나 갈 수 있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올 시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예수는 최적의 시기를 골랐던 것 같다. 로마 제국이 서기 전에는 여행이 위험했고, 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는 또 다시 유럽사람들은 여행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로마가 망한 뒤에 기독교가 중국이나 한반도에 이르기까지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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