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Gauguin)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 1부

크게 나누어서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처세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부류는 이 세상이 전부이고, 죽으면 끝이니,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즐기자는 주의이다. 둘째 부류는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고, 천국이든 극락이든 다음 세상으로 가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려는 부류이다. 물론 이 두 극단 사이에 오락가락하다가 결론을 짓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

고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년)은 후기 인상파 작가 중의 한 사람이고, 우리나라에서 동학 운동이 일어나고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던 당시에 활약하던 프랑스의 미술가이다.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Clovis Gauguin)과 알리나 샤잘 (Alina Maria Chazal) 사이에 태어났다. 1850년에 어머니와 연고가 있는 페루로 갔는데,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자라는 동안 아버지의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림에도 나타난다.

7살이 되자 파리로, 가족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럭저럭 학교를 졸업하고나서 해군에 입대하여, 카리비안 해에서 근무하던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872년에 어머니의 남자 친구였던 아로사(Gustav Arosa)의 도움으로 파리의 주식시장에서 증권 중개인이 되었고, 1883년까지 돈을 잘 벌었다.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돈을 벌 필요가 없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가 보다.

1873년에 덴마크 여자 메테 소피 갓(Mette-Sophie Gad)과 결혼하여 10년 동안에 아이 다섯을 낳았다. 카밀 피사로(Camille Pissaro)와 친구가 되어 그의 집 뜰에서 그림을 그렸고, 피사로는 그를 다른 화가들에게 소개시켰다. 1884년에 코펜하겐으로 이사하여 방수포(tarpaulin) 장사를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덴마크어를 할 줄 몰랐고, 자기 나라 말도 잘 못하는 고갱한테서 코펜하겐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으려 했다.

본인은 고생했겠지만, 그림으로 전향하면서 그는 수많은 작품(789 폭)을 남겼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의 실패 때문에 크게 덕을 본 셈이다. (1888년부터 1903년까지 15년 동안 그림을 전시간 그렸다면, 매 주에 한 폭씩 그린 셈이다.)

아내의 벌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고갱이 전시간 그림을 그리자 가정이 깨졌다.

1. 신을 찾고 있던 화가


브리타니 풍경(Landscape of Brittanny), 1888년, 동경 미술관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소년과 어머니를 그렸다. 고갱은 어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누이 동생과 함께 자랐다. 산골에서 자라던 자신의 모습을 그린 듯하다.



해변의 두 브리톤 여자아이 (Two Breton Girls by the Sea), 1890년, 동경 미술관. 자식 생각이 나서 이 그림을 그린 것 같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뒤에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와 1888년에 알르(Arle) 지방에서 9주 동안 같이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았던 것 같지 않고, 고갱은 고흐를 떠났다.

1889년에 “노란 예수(The Yellow Christ)” 그림은 고갱이 기독교 신자였음을 암시한다.



마리아 만세!(Hail Mary), 1891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고갱은 이 그림에서 노란 날개를 가진 천사가 마리아와 예수를 두 타히티 여인에게 보여 준다고 설명한다. (왼 쪽 여인 뒤에 노란 날개가 보이고, 예수와 마리아에게는 후광이 보인다.)

그림도 그리고 파나마 운하 공사에 끼어 돈도 벌겸, 고갱은 마르티니크 섬(Martinique, 프랑스에 속한다)에 갔으나 2주 만에 해고되었다. 그리고 나서1891년에 유럽을 벗어나려고 프랑스령 폴리네시아(French Polynesia)로 가서 책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1895년에는 고국을 아예 등지고 타히티(Tahiti)와 히바오아 섬(Hiva Oa)에 가서 그림을 그리면서 원주민 여자들과 연애했다고 한다.
1897년에 푸나위아(Punaauia, 타히티 섬의 서부 지역)로 가서 그의 대작 “Where Do We Come From?…”을 그린다. 아내와 자식한테 버림받은 지 거의 10년이 되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98년, 보스톤 미술관.

이 그림은 바른 쪽에서 왼쪽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인이 이야기한다. 잠자는 아기로부터 시작하여, 전혀 세상 걱정이 없이 잠을 잔다. 젊을 때는 연애하고 세상에 나아가 일하고 무엇을 따느라고 바쁘다. 푸른 우상은 “저 세상”을 상징하는데, 아무리 애써도 결국은 저 세상을 직면한다. 가장 왼쪽에 있는 늙은 여자는 죽을 날이 가까워 체념한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종교에 대하여 고갱이 의문을 가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카톨릭에 확신이 없었고 (Where Are We Going?),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의 원시 종교에 마음이 끌렸던 듯하다.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으니 유럽 문화가 싫어졌던 것 같다. 그럴 법도 하다.

 

2.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는 고갱의 그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고갱의 그림을 13폭을 소장하고 있다. 그림 논평은 생략한다.



전원의 타히티 여자. 1892년. 우하 귀퉁이에 제목과 사인이 있다.



과일을 든 여인 (Woman holding a Fruit), 1893년. 아마 타히티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거룩한 샘물 또는 단 꿈 (Sacred Spring/Sweet Dream), 1894년.



아기, 1896년



타히티 생활의 한 장면 (Scene from Tahitian Life), 1896년. 일종의 경기 진행 장면인 듯하다.



카누 (Canoe), 1896년. 한 가족을 그린 듯.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남자 (Man Picking Fruit from a Tree), 1897년. 이 해에 고갱은 “Where do we come from?…”을 그렸다. 가족이 없어져 허황한 느낌이 들고, 먼 곳에 와서 그림을 그리기는 해도, 무엇 때문에 사는가 질문이 생겼을 것이다.



염소 두 마리 있는 타히티 풍경 (Tahitian Landscape with Two Goats), 1897년. 배경에 한 여인이 강아지를 데리고 서 있다.



우상 (Idol), 1898년. 마을에 있는 원주민 우상인 듯. 원시 종교에 관심이 생긴 듯.



노란 배경에 세 타히티 여인, (Three Tahitian Women against a Yellow Background), 1899년. 한낱과 그늘을 잘 표현했다.



바닷가의 여인들 (Women by the Sea), 1899년.



마리아의 달 (The Month of Mary), 1899년.



해바라기, 1901년. 해바라기가 시들시들하다.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결국 고갱은 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회의에 빠져, 자기가 그린 그림의 끝 부분에 체념한 한 늙은 여인처럼 죽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또 어떻게 생각하면, 고갱은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뻗었고, 하늘에서 그런 손을 못 본 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최은관

 

 
Tagged 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