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나 다리의 세느강. La Seine au pont d’Iena, 1875년. 추운 날에 눈이 쌓여 있는 경치를 그리고 싶었는가 보다. 증권 중개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그려본 그림 중에 하나인 듯하다. 증권을 계속할까, 아니면 그림을 마음껏 그려볼까?
만돌린이 있는 정물화 (1885년). 그림을 전문으로 할 작정은 한 뒤에 그린 그림이다.
알리깡(Les Alyscamps, Arles). 선한 사람이 죽으면 간다고 생각되던 Elisii Campi 에서 유래한 이름, 이곳에 묻히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많은 시체가 여기로 수송되었다고.) 1888년. 죽는 것을 생각해 본 때였는가 보다.
아름다운 안젤라(La belle Angela), 1889년. 그림을 그리면 가족의 문제도 잊을 수 있었겠지.
누런 수확(La moisson blonde), 1889년.
수페네커의 아트리에(L’atelier de Schuffenecker), 1889년
부채 있는 정물화 (Nature morte a l’eventail), 1889년. 일본 그림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노란 그리스도 배경의 자화상 (Portrait de l’artiste au Christ jaune), 1889-90년. 자화상에 배경으로 넣었으니, 노란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본인도 대작으로 생각한 듯하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을 메꾸려고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타히티 여인들(Femmes de Tahiti), 1891년.
식사 (Le repas), 1891년, 원주민들은 바나나와 과일로 간단히 식사하는 것 같다.
기쁨 (Joyeusetes, joyfulness), 1892년. 한 여인은 피리를 불고 다른 여인은 그늘에서 쉬고, 나무에서는 흰 꽃(?)이 떨어진다. 멀리 배경에는 타히티 여인들이 우상 앞에서 절을 하는 듯. 좋은 시절을 즐거워하는 듯하다.
브리타니 경치. 1894년.
브리타니 여자 농부(Paysannes bretonnes), 1894년.
Vairumati (여인의 이름인 듯), 1897년, French Polynesia.
백마(Le Cheval Blanc), 1898년. 외딴 섬에 와 있는 자신을 백마와 비교했는지 모른다. 기독교에서 위로를 받기는 했어도,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어 이렇게 그림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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