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살던 삼국 시대의 도기(陶器)

중국의 역사 소설 중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은 아마도 삼국지일 것이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서도 제갈량의 인기가 관우보다 높거나 맞먹을 것이다. 제갈량은 (서기 181-234년) 후한 말기에 태어나 27살이 되어 유비의 초청을 받고 (삼고초려) 촉한을 위해서 일하다가 54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중국이 삼국으로 균형을 잡는 것을 일찍부터 내다 보았다. 그러나 그도 앞을 내다볼 수는 없었던 듯하다. 그가 일생을 걸었던 촉한은 결국 진에게 멸망했다. 삼국 시대는 서한(西漢) 또는 후한이 망한 서기 220년부터 오(吳)나라가 진(晉) 나라에 멸망한 280년까지 계속된다.

제갈 공명의 아내는 추녀로 이름났다고 하지만, 이것은 아마 중국인이 외국인을 싫어하는 습성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 같다. 아내 황월영은 그의 스승 황승언의 딸이었는데, 머리털이 노랗고 피부가 검었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황승언의 가족 중에 서양 사람의 피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

서기 228년에 마속이 가정 싸움에서 어이없이 패한 뒤에, 제갈량이 2천5백 명의 수비병만 있는 서성(西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마의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고 한다. 제갈량은 부하들을 평민으로 변장시켜 성문을 깨끗이 쓸게 하고, 누대에 올라가 향불을 피우고 한가히 거문고를 탔는데 이 空城之計에 넘어가 사마의는 퇴각하였다고 한다.

삼국 시대의 도기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로 접어드는 사이에 서민들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당시에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듯하다. 쌀이 있으면 쉽사리 군대를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하니 (조조), 당시에 임금이 그리 높지 않았던 듯하다. 남의 밑에 들어가 병사 노릇을 하면, 죽을 때 죽더라도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돈으로 따져 중국인의 일인당 소득이 $500-60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민들이 늘 전투에 시달리니, 匠人들이 도기 따위를 공들여 만들기가 어려웠을 듯하다. 대체로 이런 시기에는 도기가 투박하다. 6-25 전쟁 시에 한국 장인들의 작품도 아마 마찬가지로 다른 시기보다 열등했을 것이다.

그러면 제갈량은 어떤 향로에 향을 피웠을까?



後漢 시대의 香爐. 아직 채색하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으나 향로를 정성들여 만들었다. 물론 맨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도공의 바퀴(potter’s wheel)를 이용하여 그릇의 둥근 형태를 잡고 그릇이 어느 정도 마른 뒤에, 구멍을 내었을 것이다. 채색하는 도료는 당나라 시대에 가야 발명된다.





삼국시대의 향로. 후한 시대의 향로보다 품질이 나빠진 듯. 도공의 기술이 퇴보했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도공들이 전쟁에 끌려가 병졸이 되었을 터이고, 남아 있는 도공들이 큰 정성을 들이지 않고 대강대강 만든 것 같다.

후한 말기, 서기 156년에, 삼국시대 중국의 인구는 56,500,000 정도 되었다고 한다. (위키백과) 사마의가 삼국을 통일했을 때는 2천만 정도로, 약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아마도 끊임 없는 전쟁 통에 평민의 살림살이가 고달팠을 것이고, 장인(匠人)들도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좋은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호(壺, 호리병), 이 병에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재를 담았던 듯. 사마의 손자 사마염이 건국한 西晉 (265-317년)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한다.
불교가 전에 들어 왔으나 후한 말기에 불경들이 한자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불교가 중국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 호리병에는 절, 불교 신도, 그리고 새들이 보인다.



오나라에서 만든 호리병. 여승(?)과 새들을 새겨 놓았다. 역시 불교가 오나라에도 성행한 듯. 새가 무엇을 뜻하는지.



Chamber pot (요강). 지체 높은 사람들이 밤에 일어나 멀리 일 보러 나갈 수 없으므로, 에헴, 이런 것을 이용한 듯.



이 호리병은 무슨 용도에 쓰였는지 알 수 없다. 전쟁이 끊이지 않아 어설프게 만들어서 쓴 듯하다.



세수 대야. 여기에 물을 담아서 세수를 했던 듯.



물을 담는 항아리. 이것도 적당히 만들었다.



벼루. 이 벼루도 아무런 장식이 없이 간단히 만들었다. 전쟁이 많아서 글 쓰는 데 사치를 부릴 수 없었던 듯.



부뚜막 모형. 부뚜막에는 솥을 올려 놓는 구멍이 두 개가 있다. 조선 시대에도 비슷한 부뚜막이 사용된 것 같다.



세수 대야를 엎어 놓은 것.



고리 달린 항아리.
술이나 기타 용액을 담은 항아리를 시장으로 또는 집으로 나르려면 밧줄로 항아리를 꿰어서 날랐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삼국 시대에는 전투가 잦아서, 인구도 많이 줄었고, 평민들의 살림살이가 고달팠던 것 같다. 그래서 도공들이 기술은 있어도, 대체로 기초적인 살림 도구를 적당히 만들었던 것 같다.
제갈량, 유비, 관우, 장비의 이야기는 읽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삼국시대가 6.25 동란보다도 더 고달팠던 시대였던 것 같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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