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의 비극: 어디까지 신화(神話)이고 어디까지 사실인가?

보통 사람들은 마사다가 유대인 독립군이 로마 정부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항전하다가 마지막에1천 명이 자살한 곳이라고 알고 있다. 이 이야기가 얼마큼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1. 예루살렘의 포위
먼저 유대인의 독립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살펴 보자. 로마는 군대를 양성하고 그리스 (기원전 133년), 실루시드 왕국과 팔레스타인 (63년), 그리고 에집트(30년)를 정복하였다. 일일이 개인에게서 세금 걷는 것이 성가시므로, 로마는 정복한 각 지방(province = pro vincia, 전에 정복된 곳)에 다스리는 총독을 임명하고 세금을 부과했다. 어느 지방이나 로마인 총독은 로마 정부에 물어야 할 세금보다 더 걷은 것은 자신이 쓸 수 있었다.

로마는 또한 로마에 협조하는 유대인을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고, 유대인은 이러한 간섭을 분개하였다. 예수가 서기 30년(?)에 돌아가시고 난 후, 서기 39년에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하고 로마 제국 전역에 어떤 성전에나 그의 조상(彫像)을 세울 것을 명했다. 오직 유대인만 이를 거부했고 칼리굴라는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갑자기 그가 살해되어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서기 66년에 마지막 총독 제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17 달란트의 은(銀)을 탈취한 것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다. 일차적으로, 이 소동은 예루살렘 성전이 많은 은을 모아놓고 공익 사업이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데 이런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 폭동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은 집단마다 달랐다. 사두개인(saducees)은 온건파였고, 다만 플로루스 총독이 해임되기를 바랐다. 열심당(Zealots)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주장했고, 시카리파(sicarii)는 로마인 뿐 아니라 친로마파 유대인도 서슴치 않고 살해하였다.

이 폭도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로마인 수비대를 몰살했고, 뒤이어 이웃 시리아의 총독 케스티우스 갤루스(Cestius Gallus)가 보낸 군대도 마찬가지로 무찔렀다. 이러한 초기의 승리는 폭도에게 어쩌면 자기들이 로마 군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고, 따라서 반란군의 수가 차츰 늘어났으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이 당시에 유대인 중에는 독립 전쟁을 일으킬 만한 통일된 지도층이 없었고, 폭도들이 자세한 전투 계획이 없이 전쟁을 일으켰으므로, 이것은 독립 전쟁이기보다 폭동으로 보아야 한다. 이 폭동이 큰 전쟁으로 확대되어 많은 유대인이 죽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유대인의 호전성을 보고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조만간에 승산 없는 독립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견한 듯하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될” 정도로 성전이 파괴되리라 예수는 예언하였다.
독립군이 형성되자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로마 군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각 지역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갈릴리에는 요세푸스(Josephus)를 독립군 지휘관으로 보냈다. 요세푸스는 로마를 전에 방문한 적이 있었고, 로마 군대의 본을 따서 65,000명의 군대를 훈련시켰다.
유대인이 전투 태세를 갖추자 67년 봄에 로마의 황제 네로는 베스파시안(Vespasianus) 장군을 혁명을 진압하라고 보냈고, 그의 아들 타이투스(Titus)가 곧 그와 합세하였다. 이들은 전투 경험이 많은 군인이었다. 6만 명이 되는 로마의 군대가 폭도의 세력이 가장 큰 갈릴리에 투입되었다.
47일 만에 조타파타(Jotapata) 요새가 함락되어 패하자 요세푸스는 항복했다. (타이투스 앞에 잡혀 오자 그는 타이투스가 후일에 황제가 되리라 예언하여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는 1세기의 유대인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때 갈릴리 지방에서1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 지역의 투쟁을 전혀 돕지 않았다.
서기 68년에 네로 황제가 암살되었고, 베스파시안 장군은 예루살렘 공격을 중단하고 새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다. 69년에 갈바(Galba), 오토 (Otho)와 비텔리우스(Vitellius)가 차례로 황제가 되었으나, 곧 암살되거나 죽었고, 그 해 12월에 베스파시안은 황제가 되어 79년까지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갈릴리에서 패한 폭도 중에 기스칼라 요한(John of Gischala)은 안식일이니까 타이투스에게 기스칼라에 입성하지 말라고 부탁해 놓고서, 밤중에 혼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독재자가 되었다. 요한을 몰아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은 시몬 바 교라(Simon bar Giora)를 성에 들였다.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시몬은 윗도시 (예루살렘의 유대인 구역, 아르메니아 구역 + 시온 산)를 장악했고, 요한은6000명의 군대로 아랫 도시의 (나머지 지역, 윗도시보다 낮은 곳) 일부와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를 차지했으며, 열심당 엘레아자(Eleazar ben Simon)는 나중에 요한과 합세하였다.
이 두 파는 서로 협조하는 대신에 다른 파를 항복시키고 전권을 잡으려고 서로의 양식을 불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추수하기도 전에 타이투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항복하고 싶어하는 유대인들이 늘어날까 걱정하여 69년 12월에 기스칼라 요한은 예루살렘에 쌓여 있던 식량의 대부분을 태워 버렸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포위되어도 몇 년 동안 버틸 수 있는 많은 식량이었다. 이 지경이 되자, 굶어 죽는 유대인이 로마 군대의 손에 죽은 사람만큼 많았다. 아기를 잡아먹은 자도 있었다고 한다. 죽은 자가 1백만을 넘었다고 한다. 서기 70년에 일어난 이 예루살렘 포위전은 온건한 다수가 소수의 과격파를 다스리지 못하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마침내 서기 70년 8월 29일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타이투스 장군은 처음에 예루살렘 성전을 남겨 두고 로마인의 신전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어느 로마 군인이 던진 불막대로 인하여 불이 빨리 퍼져, 성전이 불에 탔고, 이 불은 예루살렘의 주거 지역까지 번졌다. 이렇게 되자, 타이투스는 군대에게 성전을 밀어버리라고 명을 내렸다. 그야 말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단지 서쪽에 지금은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기초 담만 남았다.
이렇게 로마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대인의 1차 독립전쟁은 서기 70년에 끝났다. 그러나 소수의 유대인 군대가 사막 지역의 마사다로 후퇴하여, 3년을 더 버티었다.
73년 4월에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가 마사다에 남아 있던 유대인의 잔당을 소탕하려고 요새를 둥그렇게 둘러싼 돌벽까지 흙을 쌓아올렸는데, 로마 군대가 요새에 진입하기 전 날, 남아 있던 유대인 잔당은 몇 명을 제외하고, 전부 자살했다고 한다.
(참고 서적: Richard Matthis, First Jewish-Roman War, December 1965 issue of Military History)

2. 마사다 비극의 진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아버지 안티파터(Antipater)가 죽은 뒤에 이 요새를 점령하였다고 한다. 나크만(Nachman)은 20세기에 들어서서 정치적 목적으로 마사다 신화가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며 다음 사실을 기록하였다.[주: 나크만의 “마사다 신화,” Nachman ben Yehuda, The Masada Myth: Collective Memory and Mythmaking in Israel, 1995].

(1) 서기 66년에 시카리(sicarii) 일파는 주로 로마인과 유대인을 서슴지 않고 많이 죽였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에게 미움받아서 예루살렘에서 쫓겨 났고, 이들은 아마도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마사다를 점령했다.

(2)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마사다를 점령하고 있던 사람들은 열심당이 아니라 시카리파였다. 이들은 독립 전쟁을 일으켰던 열심당보다도 과격한 집단이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들은 마사다 근처의 엥게디 (Ein Gedi)를 밤에 습격하고 남자들을 마을 바깥으로 쫓아냈으나 떠나지 못한 유대인 여자와 어린아이 700명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나서 먹을 것을 탈취하여 마사다로 가지고 갔다.

(3) 마사다의 포위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직후에 시작되지 않았다. 서기 73년에 로마의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를 포위했다. 로마는 마사다에 남은 시카리가 다시 독립 전쟁의 불씨가 될까 두려워 이들을 소탕하기로 작정했다. 이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걸렸고, 또한 실바는 마사다를 포위하기 전에 헤로디움(Herodium)과 마케루스를(Macherus) 먼저 점령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4) 로마 군대의 마사다 포위는 3년 동안이 아니라, 서기 72-73년 겨울부터 봄까지 4개월이나 6개월이 걸렸다.

(5) 로마의 군대는 산밑에서부터 마사다 꼭대기까지 빈 공간에 흙을 쌓은 것이 아니라 꼭대기까지 잇는 울통불퉁한 천연의 산마루에다 흙과 돌을 더 얹어 바퀴를 단 공성탑과 투석기가 접근할 수 있도록 산비탈을 직선으로 만들었다.

(6)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는 유대인의 저항이 극심했다. 헤로디움은 금방 함락되었으나 마케루스가 포위되었을 때에도 유대인의 저항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마사다가 포위되었을 때, 안에서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고 한다.

(7) 독립 전쟁을 주도했던 시몬 바 교라 (Simon bar Giora)는 로마인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잡혀서 로마에 끌려가서 죽었으나, 시카리파는 마사다에서 사는 데 익숙하여, 거기서 나오기를 싫어 했고 로마인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정신이 부족했다.

(8) 나크만에 따르면 마사다의 주둔하고 있던 시카리파 전투원은 250에서 350명에 불과했을 것이라 한다. 실제로 마사다에 있던 건물 유적을 보면, 1백 명이 거하기에도 어려웠을 듯하다.

(9) 요세푸스는 마사다가 포위되기까지, 로마인과 시카리의 전투는 없었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시카리인들은 로마인과 전투하기를 꺼려했고, 암살을 일삼았다. 저항이 있었다면, 로마인이 요새의 벽을 돌파하던 마지막 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사다에는 축구 공보다 조금 적은 크기의 돌들이 수십 개 남아 있을 뿐이다.
 

3. 마사다에 몇 명이 남아 있었는가?
로마의 군단은 보통, 보병4,80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200명의 기병을 합치면 5000명 정도가 된다. 실바의 제 10군단은 토목 공사를 보조하는 비전투 요원까지 합쳐서 1만 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마사다 주위에 포로가 된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방어벽을 쌓았고, 마사다 고원에 이르기까지, 주위에 있는 돌들을 모아서114 미터에 달하는 둑을 쌓았다. 서기 73년 봄에, 두세 달 만에 이 둑을 쌓았다고 한다.

이 시카리파의 지휘관은 엘라자르 벤 야이르 (Elazar bem Yair)였고, 마사다가 점령되기 바로 전날 저녁에 방어벽은 불에 타버렸고 다음날에는 로마인들이 물밀처럼 밀어들어 올 것이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의 대량 자살은73년 4월 15일에 일어났다. 960명의 거주자들이 식량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불살랐다고 한다. 먼저 남자들이 자기 가족을 다 죽이고, 다음에10명 중에 하나가 나머지를 죽였다. 이런 식으로 다 죽고, 여인 2명과 아이 8명이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 광경을 직접 목도한 사람은 아니고, 간접으로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죽은 사람의 수는 1백 명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1) 포로가 된 유대인들이 둑을 쌓는 공사를 하는데도 마사다안에서 아무도 이들을 죽이지 않았는데, 더러는 시카리가 동료 유대인을 죽이기 싫어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엥게디에 가서 자기들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유대인, 그것도 여자와 어린아이 700명을 학살하던 이 시카리 일파가 그렇게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그보다 이미 성안에 남아 있는 시카리파 유대인이 몇 명 남아 있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포위되기 전에 남아 있던 수는 더 많았을지 모르지만, 공사하는 몇 달 동안 날마다 담을 넘어서 도망치고 몇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실제로 공사하는 데 유대인이 동원되었으므로, 이들과 자연히 섞여 노동자인 척하고 어둑해질 때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2) 마사다에서 28명의 유해가 발견되었고, 이 중에 더러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의 것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마사다를 시카리파가 점령했을 때 잡혔던 로마인이었을 것이다.
(3) 이 고지에서 1천 명은 커녕 1백 명도 먹여 살리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밤 동안 응집되는 이슬을 모아서 목욕이나 빨래는 커녕 먹을 것을 요리하는 데 쓰기에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휘관이나 몇 사람이 쉴 곳은 이 산꼭대기에 있지만, 그렇게 좁은 곳에 백 명만 모여 있어도 갑갑하고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4. 마사다의 유적

마사다로 들어가는 입구


지금은 케이블 카로 쉽게 올라갈 수 있다.


걸어가고 싶은 사람은 이렇게 오솔길을 따라서.


정상의 경치


아마도 거실


벽화가 있었던 듯하다.


멀리 사해가 보인다.


복도


벽은 돌과 진흙으로 되어 있다. 사람이 사는 방과 식량 및 무기를 저장하는 방을 갈라놓은 듯하다.


마사다 모형


산밑에 로마인의 캠프 유적.


둘째 캠프.


오솔길을 따라서 헤롯의 궁으로 갈 수 있다.




헤롯 궁의 모습


목욕탕. 아마도 정화 예식에 쓰였던 듯. 밤이슬을 모아서 얼마나 자주 목욕을 했을지 궁금하다.


로마 군대가 쌓은 길, 흙과 돌을 사용하여 바퀴 달린 파성퇴(破城槌)를 밀 수 있도록 완만한 경사로 평탄하게 만들었다. 천연의 능선은 직선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 노동자들이 이 둑의 울퉁불퉁한 곳을 메우고, 평평해진 모서리로 파성퇴를 끌고가서 마사다의 벽을 무너뜨렸다.

최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