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은 큰 아들과 아내를 죽이고 난 뒤에 마음이 많이 괴로왔는지, 어머니 헬레나에게 비용은 마음대로 쓰고 예루살렘에 가서 기독교의 유물을 찾으라고 어머니를 보냈다. 헬레나는 이 때 80대 노인이었다고 한다. 신약에 따르면, 예수는 아리마대 요셉의 집 뜰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예수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고생 끝에 헬레나는 예루살렘의 주교의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 바위를 파서 만든, 예수가 묻혔다는 무덤을 찾아 냈고, 예수가 매달렸다는 나무 십자가를 찾아 가지고 327년에 돌아왔다. 콘스탄틴은 그 무덤 자리에,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ure)를 세웠다.
서기 325년에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니케아 종교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신약의 편찬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 회의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homoousion)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파, 그리고 두 분이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homoiousion) 아리우스(Arius) 파가 대결되었으나,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몰리고 회의가 끝났다. 글자 한 자 차이로 (homo 와 homoi) 두 파가 종교 회의에서 싸웠다고도 볼 수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바티칸 박물관), 왼쪽에 콘스탄틴 대제가 어느 주교(아마도 유세비우스)와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 헬레나는 330년에 돌아가셨고, 331 년에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노플에 큰 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개축되어 오늘날의 아이아 소피아(Hagia Sophia, “Holy Wisdom”)가 되었다. 같은 해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케자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손으로 양피지에 쓴 성경 50부를 주문하였다. 이것은 막대한 금액이었을 것이다. 아다나시우스는 당시에 3백명이 넘는 서기관들이 성경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콘스탄틴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 외에도, 여러 유명한 교회를 지었다. 이 50권을 여러 교회에 비치하려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이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어쨌든 신약에 무슨 글이 들어가야 하는가 교회들 사이에 합의가 없었으므로 당시에 신약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니케아 종교회의가 있은 뒤에 오래 지나서, 서기 367년이 되어서야 아다나시우스가 오늘날 보는 신약의 목록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세례받는 콘스탄틴 (바티칸 박물관)
콘스탄틴은 자식을 잘못 죽여서 후회가 막심했던 듯하다.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노모를 예루살렘에 보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교회들을 짓고 거기에 비치하려고 신약의 편찬을 시작하였으니, 그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역사를 바꾼 사람 중에 하나이다. 신약의 편찬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337년에 세례를 받고 죽었다. 한 사람이 수고하고 많은 사람이 덕을 본 것이다.
콘스탄틴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신약은 언젠가 편찬되었을 터이지만, 몇 백년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콘스탄틴의 덕으로 서양 세계는 로마의 정치 및 사회 문화를 받아들였다. 또한 그의 힘을 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를 버리고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를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까지 비단길을 오가면서 중국인은 장사에만 치중하고 서양에서 정치, 종교, 사회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대신에 불교가 들어와 동양인에게 도덕을 가르쳐 다행이었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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