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시절에 로마인의 생활 모습, 폼페이

고구려 (기원전 37 년 – 668년), 백제, 신라, 이 세 나라는 예수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생겼고, 1세기 말이 되어서도 초기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 바빴던 것 같다. 서기 2세기 말이 되어서야 왕권이 아들에게 상속되었으니, 그 전에는 삼국이 세금이나 제대로 걷었는지 알 수 없다. 정부의 수입이 얼마 안 되었으니, 이러한 고대 국가가 무슨 큰 건물을 세운다든가 저수지를 만들 힘이 없었을 것이다. 고대 국가들의 그러한 빈약한 경제하에서 서기 1세기에 한국인의 살림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어떤 집에서 살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별로 기록이 없다.

예수가 돌아 가신지 40년이 안 되어, 서기 79년에는 이탈리의 베수비우스 (Vesuvius) 산이 폭발하였다. 폼페이(Pompeii)를 비롯하여 인근의 여러 도시의 주택과 로마인들이 갑자기 화산재에 덮여 많은 사람이 죽었고, 재산도 많이 재에 덮었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 덕에, 그들의 유적이 남아서 폼페이 시 전체가 예수가 살던 시절에 로마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후세 사람들에게 자세히 보여 줄 수 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폼페이의 인구는 당시에 2만 명이었고, 빵을 만드는 집이 40 군데, 술집과 호텔 130 개소, 그리고 창녀집이 30 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폼페이(Pompeii)는 로마인 유적이 가장 넓은 지역에 남아 있으나,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고, 어콜라노 (Ercolano, Herculaneum )에는 작은 지역이나마 보존 상태가 제일 좋다. 이 외에도 스타비아 (Stabia) 와 보스코레알레(Boscoreale)에도 많은 벽화가 남아 있다.
그러면 폼페이의 유적을 살펴본다.


폼페이 유적 입구.
 

1. 공공 건물
공공 건물에는 신전, 포럼, 원형 극장, 시청, 법원, 그리고 시장이 있다.

(1) 신전


아폴로 신전.


주피터 신전

로마인은 자신들이 개발한 종교가 따로 없고, 그들의 종교는 그리스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다신교였다. 도시마다 아폴로나 주피터를 모시는 신전을 지었다. 도덕도 사랑도 가르치지 않는 열등한 종교였지만, 로마인들은 열심히 믿어서 신전을 지었는가 보다. 더 좋은 종교가 나타나자 그들은 얼른 받아들였다.


(2) Forum (로마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 장소)


포럼은 로마인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이었다. 포럼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보인다. 이 포럼의 한쪽 면에는 음식 시장이 있다.


basilica (courthouse,법원). 후일에 그리스도 교인들은 교회를 이 스타일로 짓게 된다. 동양 사회에서는 법원의 개념이 최근에야 도입되었다. 2천년 전에 법대로 다스리고 법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로마인의 개념을 현대 국가들이 받아들였다.

(3) Macellum (시장).


바른 편에 macellum(market, 시장 건물)이 보인다. 여기가 폼페이 시민이 음식을 살 수 있는 시장이다.

(4) Curia (시청, 시민 집회소)


(5) 극장 및 검투사의 막사


소극장 (Teatro piccolo). 큰 극장과 원형 극장도 있다.


검투사들(gladiators )이 묵는 막사. 이들은 폼페이의 원형 극장에서 TV가 없는 로마인에게 오락을 제공했다.

(6) 티베리우스의 아치 (Arch of Tiberius)
때때로 황제들이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하여 무슨 건물을 세우곤 했다. 티베리우스는 예수가 공생활을 하던 당시에 황제였다.


티베리우스 아치.


각 집과 상점에서 매일 물로 거리를 씻기 때문에, 길을 건널 때는 디딤돌을 딛고 건너야 한다.



 

2. 로마인의 별장
그러면 예수가 살던 시절에 로마인 귀족이나 부자의 전형적 별장이 어떻게 생겼는가? 다음 그림을 보면, 여러 사진에 나오는 로마인의 별장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Diana Kleiner 강의 참조.)
기원 1세기에 중산층이 생겨서, 귀족이 아니더라도 상인으로서 성공하여 돈을 벌면 폼페이 같은 곳에 별장을 가질 수 있었다. 큰 별장에는 벽화들이 여러 방과 페리스타일에 있는데, 좋은 벽화들은 보존하기 위하여 나폴리 박물관로 옮겨 놓았다.



compluvium (아트리움 지붕에 열려 있는 네모난 구멍)
1은 입구, 2는 아트리움, 3은 바닥에 네모난 물웅덩이로 빗물을 모으기 위한 시설이다. 바로 위에는 지붕이 열려 있어 비가 떨어지게 되어 있다. 큰 집의 경우는 이 물웅덩이도 여러 기둥에 둘러 싸인다. 4는 작은 침실, 5는 날개 (약간 넓은 침실), 6은 사무를 보는 곳, 7은 식사하는 방, 식사하는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소파가 셋 있고, 각 소파는 왼쪽에 방석에 기대는 세 사람이 기댈 수 있고 한다. 정원을 내다 보면서 식사할 수 있다.
8은 페리스타일, 가운데는 햇빛이 들어오도록 지붕이 덮이지 않았고 기둥들이 4면을 지탱한다. 입구와 반대 쪽에 있다. 페리스타일의 가운데는 주로 정원으로 쓰이고 나무들이 있다.
 
3. 개인 주택
개인 별장이 많이 있으나, 부자 로마인의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몇 집만 살펴 본다.

(1) 율리아 펠릭스의 집 (Predia Iulia Felix)


이 집의 페리스타일.



빵굽는 사람과 아내(Terentius Neo and his wife). 이 그림은 나폴리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Napoli)에 걸려 있다.
이 여인은 네로 황제 시대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고 비싼 붉은 옷을 걸쳤다. 남편은 심판관 등급의 토가를 입었으며, 로툴루스 (아마도 양피지로 만든 두루말이)를 들고 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이 글 쓰는 사람의 흉내를 내는 초상화. 1세기에 귀족이 아니고 농사를 짓지 않는 중산층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2) 로레이우스 티부르티누스 (Loreius Tiburtinus) 또는 옥타비우스 콰르티오(Octivius Quartio)의 집
이 곳에는 정원이 거의 다 차지하고 집 자체는 별로 크지 않다. 앞에서 말한 전형적 별장이 아니라, 페리스타일을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만든 경우이다. 대부분의 로마인 별장이 단층 집이었으나, 당시에 2층 집을 짓기 시작했다. 정원에 많은 공간을 할애했으므로, 그리고 정원 끝까지 바라볼 수 있도록 이 집은 2층으로 지었다. Via Abbodanza 에 있다.


정원을 즐기기 위해서 시골에 이런 별장을 마련한 듯하다. 크리스티안 울루르(Cristian Uluru)에 따르면 아마도 기원전 2세기에 지었을 것이라고.




Biclinium(소파가 두 개 있는 방)은 이 집에서 lararium (주인을 지키는 수호신들을 모신 사당)이 가운데 있고, 좌우에 두 개의 벽화가 걸려 있다.


샘물에 있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나르씨스(Narsissus).


Pyramus and Thisbe (두 연인은 죽는다)
왼쪽에는 나르씨스가 자기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취한 그림이 있고 (그래서 죽는다), 바른 쪽에는 씨스비(Thisbe)가 피라무스(Pyramus)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자살하는 그림이다. 또 한 쌍의 그림은 악테이온 (Actaeon)이 벌거벗은 여신 다이아나(Diana)를 발견하는 그림인데,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다이아나가 물을 튕겨 악테이온을 사슴으로 만들어 말을 못하게 만들었고, 동료 사냥꾼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고 죽인다. 세 그림 모두가 사랑 때문에 죽는다.

(3) (조개 속의) 비너스 집 (The House of Venus in the Shell, Casa della Venere in Conchiglia)


비너스의 집의 페리스타일.
이 벽에는 프레스코가 세 개 있다.


가운데 그림은 비너스가 조개에서 태어나는 벽화. 집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전쟁의 신 마스(Mars).


분수 그림.

(4) House of the Centennial



이 집은 1879년, 즉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한지1800 주년에 발굴되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이 그림은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Bacchus가 표범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내민다. 옆에 있는 산은 베수비우스 화산이라고 오해되었으나 그냥 포도가 자라는 산을 가리킨다.
 

4. 상인 건물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에서 비로소 중산층이 있었다는 것은 폼페이의 상인들의 건물이 입증한다. 인구가 2만이나 되는 이 도시의 시민을 먹여 살리려면 여러 가지 상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1) Laboratorio Tintori (Dyers’ laboratory, 옷에 물감을 들이는 사람들의 작업소)
보통 시민은 흰 토가를 주로 입었으나, 색 있는 옷을 입고 싶은 사람들의 수요가 많았던 듯하다. 이 집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자.


큐피드들 사이 있는 비너스. 비너스는 (비싼 자주) 색 물감을 들인 옷을 입고 있다.

(1) Officina di Verecundus (shop of Verecundus, 베레쿤두스의 상점)
이 점포에서는 양털로 짠 옷가지를 팔았다. 로마 남자 시민은 토가(toga)를 입었고, 리넨으로 된 튜닉 위에 입었다. 여자들은 토가처럼 몸에 두르는 스톨라(stolla)를 걸쳤는데, 리넨(linen)으로 만들었다. 창녀들은 남자의 옷(토가)를 걸쳤다고 한다. 로마의 여자들은 투표권이나 피선거권이 없었다. 이 상점에서 여러 옷가지를 팔았던 듯하다.


4마리의 코끼리가 큐피드를 가운데 있는 비너스에게 던지고 있다.

(2) 유마키아 궁전 (Edificio di Eumachia)


크리스티안 울루르 (Cristian Uluru)에 따르면, 유마키아는 세탁업, 염색업 및 옷 제조업 협회의 여사제였다고. 2만이나 되는 도시에서 옷을 만들고 세탁하고 물들이는 데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들도 중산층이다.

(4) Thermopolium of Vetutius Placidus (플라시두스의 식당)
귀족들은 하인들이 요리한 음식을 대접받았을 터이지만, 대부분의 로마 시민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바쁜 서민을 대상으로 뜨거운 음식을 대접하는 곳이 필요했다. 이 식당의 역할은 오늘날의 어느 도시에나 있는 맥도날드 집과 같은 곳이다.


Lararium (집 안에 가족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에 있는 벽화.


실내 장식.


페르골라 (pergola,넝쿨을 올려 그늘을 만들려고 지붕 높이에 만든 틀. 정원에 주로 만든었다.)


유로파와 송아지.
마지막으로, 폼페이에서 발견된 여인의 벽화가 있다.


이것이 이른바 그리스 여시인 “사포”의 초상이라고 한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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