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단수(神壇樹)는 생명나무였을까?

1.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상관 관계
수메르어와 한국어가 동일 근원에서 나왔다는 주장과 두 언어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영어 단어 수는 약 23만어 정도 되고, 한국어의 어휘는 50만이나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보통 사람들이 쓰는 단어는 10만이 안 될 것이다. 이 두 언어 중에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many 와 많이, 또는 dung과 똥이 비슷하다고 우겨 볼 수도 있다. 라디오와 radio처럼 최근에 빌려온 단어를 제외하면, 영어와 한국어는 거의 전혀 상관이 없는 언어이다. 그러니 상관 없는 두 언어가 뜻과 발음이 비슷할 빈도 또는 확률은 10만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요즈음에 수메르어와 한국어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 들린다. 그 접근법은 두 언어의 단어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언어의 관계를 조사하려면, 얼마나 두 언어가 다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도 서로 다른 지방에서 고립되면 따로 언어가 진화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부정적 방법이고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다. 수메르인이 쓰던 각 단어와 뜻과 발음이 비슷한 한국어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하나하나 비교해야 되니, 그렇게 할 재력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방법보다, 두 언어가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이것이 긍정적 방법이다.

게다가 모든 단어가 다 똑같이 중요하지는 않다. 원시 사회에서 쓰던 수메르어와 원시 한국어를 비교해야 할 터인데, 기록에 있는 원시 수메르어는 자료로 쓸 수 있어도, 원시 한국어 기록은 거의 없으니, 우리는 원시 수메르어와 현대 한국어를 비교할 수밖에 없다. 원시 수메르인이 쓰던 단어들은 사회가 복잡하지 않았으니, 기껏해야 명사 몇 백 개, 그리고 나머지는 동사나 기타 형용사일 것이다.

수메르어 기본 단어 1000개 중에서 오늘날 한국어의 기본 단어와 짝이 맞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두 언어의 관계를 가리키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두 언어가 한국어와 영어처럼 상관이 없다면,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가 겨우 하나가 되기 힘들 것이다. 확률로 따지면, 원시 수메르어와 원시 한국어가 비슷했다 하더라도, 지난 4-5천년 동안에 한국어가 너무 많이 변하여 두 언어의 친척 관계를 못 알아 볼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 세종 대왕시절에 쓰이던 한글도 이조 초기에 쓰던 말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알아먹기가 힘들다.

두 언어가 같은 어순 (주어+ 목적어 + 동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같은 계통의 언어라는 증명은 안 되더라도 두 언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어순이 다르면, 두 언어가 서로 예전에 친척 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수메르어와 한국어처럼 원시 사회의 기초 단어가 서로 비슷하면 하나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다른 것에서 파생되었거나, 두 언어가 공통된 부모언어에서 파생된 것을 가리킨다.

창세기 4장에는 에덴 동산의 이야기가 나오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4장 14절) 에덴을 떠나면서, 가인을 만나는 자가 가인을 처죽일까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가인이 에덴을 떠날 때, 땅에는 이미 가인을 모르는 사람, 아담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가인은 아마도 이들, 수메르족을 무서워한 것이고 중국인을 무서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가인이 생각한 세계는 걸어서 또는 말을 타고 한 두 달 동안 갈 수 있는 거리였을지 모른다. 에덴 동산 옆에는 적어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있었다고 하니, 에덴 동산이 사실로 있었다면, 그 자리는 이 두 강이 거의 만나는 지역, 바빌론 근방이었을 것이다.

수메르인은 인류 중에 최초로 사냥을 그만두고 농경사회를 이룬 민족이다. 기원전 8천 -6천년부터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어로 ‘강 사이’라는 뜻) 지역에 정착하였다.

수메르인은 기원전 5천년 경에도 우바이드(Ubaid) 문화를 일으켰고, 이 문화는 고도의 토기 기술을 보여준다. 다음의 마자야오 토기와 질은 비슷하지만 우바이드는 이보다 3천년이 앞선다. 중국의 토기 기술이 수메르에서 빌려온 것일 수 있다. (아니 중국인이 먼저 베끼고 난 다음에 동방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게다가 토기의 상부만 도료를 칠한 것도 서로 같다. 수메르인이 중국인으로부터 베꼈다고 우기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마자야오 토기 (기원전 2200-2000년).

2. 우수한 수메르 문화
수메르 사람은 인류에게 60진법(sexagesimal system)을 가르친 민족이고 그들의 영향은 오늘날의 시간과 분, 초의 계산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또한 맥주를 발명하여 인간의 사회생활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플림톤 서판. 콜럼비아 대학도서관. 피타고라스 정리의 예를 적은 진흙서판.

다른 진흙 서판의 글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삼각형의) 길이는 4이고 대각선은 5이다. 폭은 얼마냐? 4 x 4 = 16. 5 x 5 = 25. 25에서 16을 빼면 9이다. 무슨 수를 제곱하면 9이 될까? 3이다. 그러면 3이(삼각형의) 폭이다.

 

이 서판은 기원전 1800년에 수메르에서 어린이 학교에서 쓰인 것이라 한다. 피타고라스가 그의 정리를 발견하기 천년도 더 전에 수메르의 어린 학생들은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세계지도이다. 윗쪽에는 “해가 보이지 않는 곳” 즉 북이라고 적혀 있고, 도시들은 동그라미로 표시해 놓았다. 이 방법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지도에서 도시를 표시하는 데 여전히 쓰는 방법이다.

핼리(Haley) 혜성을 기원전 164년에 관측한 기록이다. 대영박물관

기원전 7년에 목성과 토성이 물고기좌에서 합(合, conjunction)이 된 것을 기록한 진흙서판.

세계 최초의 비슷한 말 사전. 

어째서 수메르인은 그렇게 갑자기 높은 문화를 시작했는가? 아마도 에덴 동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지리적인 장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수메르인의 생명나무 전통
바빌로니아가 생명나무 전통의 근원지인 듯하다. 이것은 아마도 에덴동산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근처에 있었던 덕분으로 제일 먼저 아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수르바니팔 임금이 생명나무의 과일을 따는 모습.

 

느부갓네살 왕이 바빌론에 지은 이시탈 대문의 생명나무과 꽃 장식.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이쉬탈은 아사달과 발음이 비슷. 우연이겠지.

기둥의 머리에 새긴 생명나무 (arbre de vie) 장식. 루브르 박물관

이웃에 있던 페니키아인도 수메르인으로부터 생명나무의 이야기를 줏어 들었다. 그들은 후일에 유대인에게 알파벳을 가르친다.

4. 수메르인의 모습
 

 

수메르인 남자 (대영박물관)와 여자(함부르그 미술관)의 모습.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수메르인은 지금 어디 있는가? 수메르인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 상당수가 고향을 떠났지만, 일부는 셈족과 섞여서 지금의 이락, 이란, 시리아 지역에서 살았고 후일에 아씨리아, 바빌론을 세웠다, 그 후손의 일부는 혼혈로서 아직도 두 강 사이에서 살고 있다.

수메르인 남자들은 대체로 머리를 밀었고,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입었다. 아담과 이브가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끌려가서 줏어들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생명나무 이야기는 물론이고.

5. 수메르인과 한국인은 전혀 상관이 없는가 아니면, 두 민족이 한 핏줄인가?
두 가지 이론이 다 극단적이다.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기에는 두 언어에서 뜻과 발음이 비슷한 기초적 어휘가 10개가 넘는다. 이 원시 사회의 어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기껏해야 1천 개?) 그렇다.  

한 핏줄이었다면, 치마를 입는 남자의 전통이나 나뭇 잎으로 옷을 해입었다는 고조선의 전통이 남아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초기의 황인종 여자(웅녀?)와 수메르에서 온 남자가 한국인의 시조를 낳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낳은 아이들이 더 동방으로 이주해 갔을지 모른다.  

환웅이 서쪽 수메르에서 온 남자였다면, 신단수(神壇樹)는 생명나무였을지 모른다. 신단수라는 나무 앞에서 단군이 제단을 쌓았기 때문에, 그를 단군이라 불렀고, 생명나무에 신이 깃든다고 믿어서 이름을 신단수로 바꾸었는지 모른다.  

수메르인은 어디로 갔는가? 원래 그들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서 살던 사람들이고 에덴 동산이 그 자리에 있던 덕택으로 높은 문화를 받은 것 같다. 수천년 동안 셈 족이 밀려들어와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남아서 수메르인은 아카드 제국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DNA 조사 결과로는 여전히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사이의 늪지대에서 살고 있는 아랍인도 그들의 후손이라 한다. 물론 고향을 등진 수메르인은 에집트에도 유럽의 여러 지역에도 갔고,  일파는 동쪽을 향하여 고조선까지 왔을지 모른다.  

수메르인은 백인에 속하니 조선 사람과 같은 민족은 아니다. 오늘날의 시리아, 아랍, 이란, 그리고 그리스 사람을 보면 대체로 예전의 수메리아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또한 최초의 유대인 아브라함도 우르에서 살던 수메리아로 들어온 셈 족의 후예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고조선인이 서방으로 가서 수메르 문명을 일으켰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한국 땅에 남아 있는 옛 토기는 즐문토기 뿐이고, 기원전 5천년 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우바이드 문화 도기도 신석기 시대 중국의 채도 보다 3천년이 앞선다. 이것은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오래 전에 서쪽에서 토기 기술을 배우고 나서 동방으로 이주했음을 가리킨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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