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에 대가들은 얼마나 벌었나?

페데리코 에트로(Federico Etro)는서기 1300년부터1550년까지1백 명이 넘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 300여점을 조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평균 그림 값은 150플로린이었고, 최고 그림 값은 1300년대에 500플로린에서 말기에는 3000플로린까지 올라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질의 그림 값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림을 후원하던 군주나 교황의 경제 사정이 나아져서 이들이 더욱 큰 그림과 대가들을 선호한 것을 반영하는 듯하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의 건축에 미켈란젤로는 16,500플로린이나 받았다.

피렌체(Firenze)에서 1252년에 주조한 금화 플로린(florin)이나 베니스(Venice)에서 1284년에 찍은 덕킷(ducat)은 모두 순금 3.5그람 정도이고 1트로이 온스는 31그람(약 9플로린)이다. 당시와 현재 선진국의 생활 수준을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유럽의 1인당 소득은 약 $500 – 1,000에 이르렀다. 1트로이 온스의 오늘날 금값 $1,325으로 계산하면, 1플로린은 약 $150이 된다. 일상 생활에는 은전 솔도(soldo)가 많이 쓰였는데, 처음에 1플로린이나 덕킷은 6리라(은전)였고 1리라는 20 솔디(은전)이었으니까, 1플로린은 120솔디였다. 나중에 금은의 환율이 변하여, 15세기에 1플로린은 7리라 10솔디 (즉 150 솔디)로 안정이 되었다.

1.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1510년)
1485년 8월에 제단화를 그리는 데, 산드로 보티첼리는 75 플로린을 받았는데, 群靑色 물감과 금박의 비용이 40 플로린이었고, 붓 작업에는 35 플로린을 매겼다. (당시에는 청색 물감과 금 배경의 그림이 유행하였다.) 당시에 피렌체에서 단순 노동자의 월급은 2플로린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때로는 물감이 너무 많이 들어 화가가 손해보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화가가 가격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를란다이오(Ghirlandaio)는 어느 제단화에 150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가 다시 비용을 올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군청색 물감은 청금석을 갈아서 만들었고, 청금석은 주로 레반트 지역에서 수입했는데, 한 온스에 4플로린 정도로 비쌌다고 한다. 금과 군청색 물감이 많이 들 경우에, 후원자는 화가가 속이지 않도록 이 두 도료를 얼마큼 쓸 것인가 계약서에 흔히 명시하곤 했다.

봄, 산드로 보티첼리, 우피치 미술관

2.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ti, 1475 -1564년)
 르네상스 시대에 누구보다도 돈을 제일 많이 번 예술가는 미켈란젤로였을 것이다. 그는 13살에 1488년에 기를란다이오의 도제로 일하면서 1년에 6플로린을 받았다. 메디치가의 수장이었던 코지모(Cosimo Il Vecchio)는 두 손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로렌조 마니피코요, 다른 하나는 줄리아노였는데 그는 경쟁 가문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고 로렌조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부터 5년 동안이나, 메디치가에서 로렌조 마니피코와 함께 식사하며 자랐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의 彫像을 3년 동안에 마치고, 그 대가로 400플로린을 받았다. 이것은 오늘날 연봉으로 환산하면, 약 $20,000에 달한다. 당시에 조각가로서 독보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는 좋은 임금을 받았던 것 같다. 메디치가에서 로렌조의 아들 조반니가 교황 레오 10세가 되고, 또한 암살되었던 줄리아노의 아들 줄리오가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되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교황청의 후원을 받아 큰 그림과 대공사를 하청받아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시스틴 성당 천장의 그림을 4년 동안(1508-12년)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는 3000 덕킷을 받았는데, 이것은 연봉 750 덕킷이요, 오늘날 $112,000가 된다. 바티칸 궁전의 건축가이자 화가로 임명되어, 미켈란젤로는 한 달에 100 플로린을 받았는데, 이 금액은 당대의 화가 티티안(Tiziano)이 교황청에서 받은 연봉이었다. 교황청과 연줄이 닿지 않은 대가들의 연봉은 100에서 200 플로린이었고, 이들은 그림을 그려 평민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임종할 때 그의 침대 옆의 서랍장에는 금화들이 잔뜩 (30킬로그람, $1,300,000) 들어있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자린고비였다는 소문도 있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당시에 (아마도 전쟁 때문에 남자들이 모자라서) 처녀들이 결혼하려면 지참금이 필요했는데, 바사리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처녀들이 결혼하도록 남모르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에게 오랫동안 시중들던 하인이 그가 죽으면 다른 이를 위하여 일하러 간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 하인에게 1천 플로린을 주었다고 한다. 죽을 때 그의 재산은 5만 플로린(약 $7,500,000)이었다고 한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년)
레오나르도는 1452년에 피렌체에 속하는 빈치(Vinci)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 피에로와 어머니 카테리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다섯 살까지는 어머니와 살았지만, 소년이 되자 아버지가 데리고 가서 길렀다. 아들의 그림 솜씨를 보고서 아버지는 당대의 대가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밑에서 그림을 배우라고 그를 맡겼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공방에서 그림을 10년간 (1466-76년) 배웠다. 예수의 세례라는 그림을 선생이 주문받았는데, 당시에는 선생이 초안을 잡고 그림을 그리지만, 때로는 수제자들이 일부를 그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에서, 예수님이 세례받는 동안 그의 옷을 들고 있는 한 천사의 그림을 그렸는데, 레오나르도의 솜씨가 너무 훌륭해서 그 이후로 선생은 다시 붓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1472년에 레오나르도는 은으로 리라(lyre)라는 현악기를 만들었고, 메디치(Medici)가의 로렌조 마니피코(위대하다는 뜻)는 그를 밀라노의 로도비코 스포르자(Lodovico Sforza) 공작에게 보냈다. 밀라노에 머무르면서, 한 수녀원의 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1495-98년에 그렸다.  그는 1년에 500 덕킷을 받았고, 4년이 걸렸으니, 아마도 총합 2000덕킷(약 $300,000)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그림의 크기로 따지면,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예배당 벽화를 그리느라고 받은 것보다 훨씬 높은 값이었다. 프랑스의 루이 왕이 1499년에 밀라노를 침공했을 때, 이 프레스코(벽화)를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엔지니어들이 이 그림을 떠갈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 포기하였다. 2차 대전 중에 이 수녀원(Santa Maria delle Grazie)은 폭격을 받아서 다 파괴되고 이 그림이 담긴 벽만 남았다고 한다. 1513년 10월에 레오나르도는 로마에서 메디치가를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고 1516년 여름에 로마를 떠났는데, 이때 레오나르도는 1년에 400 덕킷을 받았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의 “Notes”에는 1493년 7월 16일에, 카테리나가 왔다고 적혀 있다. 이 여인은 밀라노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집에서 2년 동안 살게 되었는데, 그의 세금 기록에는 카테리나가 부양 가족으로 되어 있다. 레오나르도가 장례식에 상당한 돈을 쓴 것으로 보아, 카테리나는 그의 어머니였던 듯하다. 당시에 쓰이던 주요한 통화는 베니스의 덕킷 (ducat)과 피렌체의 플로린 (florin)이었는데. 3.5 그람의 금화였다.
레오나르도는 어머니 장례식에 들어간 비용을 이렇게 적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
카테리나의 장례에 들어간 돈. 27 플로린
밀랍 2 파운드, 18 플로린 (관 위에 놓인 彫像을 만드는 데 쓴 듯)
장식된 관값, 12 플로린
십자가를 운반하고 관에 놓은 것, 4 플로린
관을 지고 간 사람, 8 플로린
사제 4명과 조수 4명 = 20 플로린
종 울리는 것 = 2 플로린
무덤을 파는 자, 16 플로린.
(매장) 허가 비용, 1 플로린
합계 108 플로린
이전에 지불한 돈
의사, 4 플로린
설탕과 양초, 12 플로린,
총합, 124 플로린
레오나르도가 1년의 봉급에 해당하는 비용을 부담하고,  사제 4명에게 장례식을 거행하게 한 것으로 보아, 카테리나가 레오나르도에게 시중드는 하녀가 아니라 어머니였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밀라노 정부의 기록소에는 카테리나가 1494년 6월 26일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자 공작으로부터 포르타 베르첼리나에 있는 한 포도원을 받게 되었는데, 카테리나가 거기서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으니, 카테리나가 그의 어머니였던 것이 분명하다.
1516년, 나이가 지긋한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이 프랑스 임금이 마련해준 앙부아주 저택에서 살았고 연봉은 400덕킷이었다. 제자였던 프란체스코 멜지가 그림들을 물려받았으나, 모나리자는 프랑스 임금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갈릴레오 (Galileo Galilei, 1564-1642년)
갈릴레오는 르네상스 말기에 1564년 2월에 피사에서 태어났다. 갈릴레오가 과학적 관찰을 중시했기 때문에 흔히 그를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1589년에 피사 대학에서 그의 수학 선생이었던 판토니(Filippo Fantoni)가 자리를 비우게 되자, 갈릴레오는 그 자리에 3년 동안 임명되었고, 그의 연봉은 60플로린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 $4,500 정도이다. 당시에 교수들은 예복을 입어야 했는데, 갈릴레오는 예복을 입지 않아 벌금을 물었다. 3년이 지난 뒤에, 이 계약은 갱신되지 않았다.
1592년에 다행히도, 파두아 대학에서 교수 자리가 비었고, 연봉은 피사 대학의 연봉보다 3배(180 플로린)가 되었다. 당장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음 18년 동안 (1592-1610년) 파두아 대학에서 일했다. 갈릴레오는 정열적인 강의로 이름을 날렸다. 갈릴레오는 이 기간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대였다고 한다.

마리나 감바(Marina Gamba)라는 여인을 만나서 두 딸과 한 아들을 낳았지만, 갈릴레오는 이들을 자식으로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봉급이 3배나 올랐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갈릴레오는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누이 동생의 지참금 지불 약속을 지키지 않아 그는 체포당할 뻔하였다. 갈릴레오는 큰 집에서 감바와 살면서,  (아마도 감바의 도움을 받아) 흔히 10명이나 되는 하숙생을 치면서 살림을 꾸려나갔고, 이들은 1000덕킷이나 냈지만 하숙생을 먹이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1598년에는 군사용 나침반을 발명하여, 그의 연봉은 520플로린($78,000)으로 늘어났다. 하숙생을 치고 개인 교수를 하고 도구들을 만들어 팔면서 얻은 소득은 학교에서 번 돈의 3배가 되었다. 1610년이 되어서 그는 친구 크레모니니에게 400덕킷이나 돈을 빌려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1609년에는 플란더스인이 3배 망원경을 가지고 베니스에 나타났는데, 그는 베니스 상원에 이 망원경을 1000플로린에 팔겠다고 제안하였다. 갈릴레오는 유리알을 가는 기술을 개발하여, 몇 달만에 8배짜리 망원경을 만들어서, 베니스의 총독에게 보여주었고, 베니스는 당장에 그의 연봉을 1000덕킷으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제안을 물리치고, 피렌체의 메디치 궁정으로 갔다.
1610년에 이르러 갈릴레오는 20배 망원경을 만들었다. 피렌체의 메디치가에서 궁정의 과학자로 초빙받은 뒤에 세 자녀를 데리고 갔으며, 메디치가의 어린 자제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메디치가에서는 새로운 발명은 이 궁정에서 처음으로 발표해야 한다는 조건 외에, 갈릴레오에게 별다른 의무가 없었고, 갈릴레오는 많은 시간을 연구에 바칠 수 있었다. 파두아에서는 후원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그의 연봉을 올려주었지만, 또한 이들의 가족 행사나 여행에 얼굴을 비치거나 따라가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그러니, 돈 보다도 시간 여유가 갈릴레오가 피렌체로 가게 된 이유였다.
드디어 1632년에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라는 책을 출판하여 메디치가에 바쳤다. 그러나 이 책은 카토릭 교회에서 금서 목록에 올라갔고 (1835년까지), 갈릴레오는 곧 교황청의 호출을 받아 1635년에 로마에 도착했다. 메디치가의 경제적 후원도 끊어졌고 그는 자택에서 연금되어 살다가 죽었다.

최은관